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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58. <광양공>농암공휘동혁「동혁전」(農菴公諱東爀「東爀傳」)
1. 문헌 목록 〉23. 23世 〉60. <절제공>송천공휘동정묘갈명(松泉公諱東丁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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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광양공>이조참판휘동혁송덕비(吏曹叅判諱東爀頌德碑)
이조참판휘동혁송덕비(吏曹叅判諱東爀頌德碑) 호남 지방의 인사(人士)들과 종친(宗親)들은 조공의 충절과 효심, 특히 서민(庶民)들 에게 베푼 시혜(施惠)의 공을 칭송하니, 그 충효와 덕망을 후세에 널리 전하여 공모(恭慕)하는바 클지라 이는 여론에 따라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동혁(東爀)이요. 자(字)는 성겸(性謙), 호는 농암(農菴)이다. 옥천조씨로 고려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충헌공(忠獻公) 휘 원길(元吉)의 十九세손(世孫)이며 특히 선조(先祖) 가운데 병자호란(丙子胡亂) 공신(功臣) 휘 암(巖)과 처사(處士) 득명(得命), 휘 성순(成淳),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휘 자옥(自玉), 증승지(贈承旨) 휘 영흥(榮興), 고종(高宗)때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휘 상록(相祿)이 공의 세계(世系)이다. 공은 학문과 큰 기량(器量)을 지닌 채 세상이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는 귀농(歸農)하여 은둔하였는데 국운이 쇠퇴하여 왜세(倭勢)가 점차 침입해옴을 보고는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왜적에 대항하는 위국충절(爲國忠節)의 공을 세웠다. 이런 사실은 찬정(贊政) 이재현(李載現)이 쓴 공의 전기(傳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천부적인 인효(仁孝)와 오민(悟敏)한 재예(才藝), 그리고 일언일행(一言一行)이 남의 본보기가 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효심(孝心)이 강하여 八세때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조석(朝夕)으로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성묘하였고, 모친께서 병환이 나자 七일 밤낮을 한 번도 눈을 붙이지 않고 쾌치료에 지성을 다하였다. 마침내는 의술로 명성(名聲)이 알려졌는데 서민(庶民)들에게는 무료로 치료하여 칭송을 받으셨다. 조상을 섬기는 정성 역시 지극하여 선조의 유택(幽宅) 가운데 길지(吉地)가 못되는 곳은 몸소 풍수학(風水學)을 연구하여 원근(遠近) 지방을 두루 답사하여 길지를 얻어 열여섯 차례에 걸쳐 이장하였으며 특히 十七세조(世祖)부터 二十二세조까지의 묘의(墓儀)를 엄(嚴)과 화(和)를, 자질(子姪)을 가르침에는 효제(孝悌)와 근검(勤儉)을, 종족간에는 항상상 돈목(敦睦)을, 붕우(朋友) 사이에는 신의(信義)를 우선으로 해야 하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라는 것이었다. 종친들과 사림(士林)에서 공의 충절과 효행을 민멸(泯滅)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일어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여 왔다. 나는 종족인데다가 공의 계자(季子) 상훈(尚勳)씨와는 평소 친분이 두터워 공의 훌륭한 사작을 익히 들어온 터라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응하기로 한다. 戊辰年 月 日 前國會副議長 忠獻公十八世孫 淵夏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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